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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항일혁명가, 노동운동가 이재유선생의 삶

  • 1920년대에 들어 일제강점기 노동자들은 1921년의 부산 부두 총파업에서부터 1929년 석달 간이나 진행되었던 원산총파업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임금인하, 해고, 민족차별, 인권탄압 반대 등을 요구조건을 내세우고 직능별, 직역별, 연대파업을 통해 자본가들과 일본경찰의 탄압에 완강히 맞섬으로써 민족해방투쟁의 성격으로 발전시켜갔다.
  • 1930년대에 들어서자 일제는 세계대공황의 타격에서 벗어나 중국을 침공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 민족말살정책과 더불어 노동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을 하였다. 이시기 많은 명망가들이 독립의 희망을 접고 투쟁을 멈추거나 친일의 길로 들어섰지만, 노동자들은 지하조직을 만들어 사회주의혁명운동과 결합하고 파업, 공장점거, 경찰서 습격 등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대항하였다.
  • 이 시기에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를 바탕으로 민족의 자주독립과 노동해방을 위해 투쟁한 '당대 최고의 혁명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이재유이다. 이재유 선생은 오늘날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의 신화로 남아있다. 그의 "영웅적 활동은 지하혁명운동 사상 최고의 기록을 우리민족의 기억에 남겼다"라거나 "당대 최고의 혁명가", "30년대 좌익운동의 산화"등의 찬사를 받고 있다. 

 출생과 성장

  이재유는 1905년 함남 삼수군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와 삼수군청 서기였던 아버지 이각범 밑에서 자랐으나 주로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며 거의 독학으로 학문을 익혔다. 보통학교에 뒤늦게 편입하였으나 과목이 너무 저급하고 배울 것이 없다며 4개월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이재유가 15세 되던 해에 3.1운동이 일어났고, 전국방방곡곡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던 조선독립사상은 식민지 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늘 기회를 노리던 그는 심부름 가는 돈을 노자 삼아 그 길로 서울로 향했다.

  그는 서울에 와서 사립보성고등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학하였으나 3개월 만에 월사금미납과 부친의 사망이 겹치면서 퇴학당했다. 이어 개성부 사립송도고등보통학교에 4학년으로 편입한 후 맑스레닌주의연구를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사회과학연구회라는 서클을 조직해 활동했으나 동맹휴학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다시 퇴학을 당했다. 송도고보시절의 학습과 투쟁을 통해 그는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며, 조선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길에 적극 나서게 된다.

 

일본유학과 감옥생활

  송도고보 퇴학 후 이재유는 일본으로 건너간다. 1927년 그의 나이 23세 되던 해였다. 일본에서 그는 사립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하여 고학을 했으나 학비문제로 퇴학당하고 일본노동조합평의회계의 동경합동노동조합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그의 맹활약은 일본 경찰로부터 70여 회의 검속을 받았고 이후 활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합법단체의 이러한 활동과 아울러 이재유는 비합법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말 경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의 후보위원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928년 초에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 가입하여 선전부를 책임지는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1928년 7월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에 연루되어 동경에서 피검, 서울로 압송되었다. 예심에 회부된 그는 지역 3년 6개월을 언도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자본>을 통독하는 한편 출옥 후 활동의 전망과 구상에 몰입하게 된다.

 

1930년대 서울서 노동운동 본격 전개( 경성트로이카 )

  1932년 12월 출옥 후 이재유는 많은 운동가를 만났다. 이때 그는 기존 운동방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론을 앞세운 인테리들이 노동대중 위에 군립하면서 일방적으로 지도하려는 행태를 비판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직접 노동자가 되어 공장으로 들어가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이 살아 있으려면 노동대중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활동가들이 직접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대중을 조직해야 한다고 봤다. 김삼룡, 이성출, 변홍대, 안병춘 등이 이재유의 지도에 따라 노동현장에 들어가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1933년 9월 노동현장을 기반으로 한 '경성트로이카'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트로이카는 새로운 조직방식이었다. 그것은 "각각의 운동자가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개인적으로 접촉하고 대중을 획득해 상당한 그룹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조직을 만든다"는 원리에 기초하고 있었다. 모든 활동가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자신과 조직의 운명을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실펀하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당시 지배적인 조직방식이었던 '오르그(organizer)'에 의한 중앙집중의 하향식의 집중만 강조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조선의 현실에 기초한 주체적 운동노선

  이재유의 이런 조직 방식은 운동에 대한 주체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코민테른을 비롯한 국제혁명조직이 식민지 조선의 운동에 대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방침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봤다. 그랬기에 국제선의 권위를 내세우는 운동가들에 대해서도 그다지 신임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현실에 기초한 운동방침과 운동노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파벌 중심의 기존 운동에 비판적이었다. 또한 그는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계급적 사고에 치우치지 않고, 반일투쟁을 위한 전 민중의 참여를 고민했다. 노동운동을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차원에서 바로 보고 전체 민중과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 노력했다.

  '경성트로이카'는 섬유,화학,금속 등 주요 공장에서 대중의 불만과 요구를 파업으로 이끌어 내고 지역의 연대파업으로 확장하는 노력을 펼쳤다. 1933년 하반기 편창제사, 중앙상공회사 ,소화제사, 고려고무회사, 동염고무회사, 조선견직, 서울고무, 종연방직, 경성제사,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 등 서울의 주요 기업에서 연쇄적으로 파업이 일어난 것은 이재유의 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자 일제는 배후 색출에 혈안이 됐다. 이현상, 안병춘, 등 1차 경성트로이카 사건으로 200여명이 검거되기에 이르렀다. 1934년 1월 이재유가 체포되면서 경성트로이카 운동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경성제대 미야케 교수 집에 도피

  일제는 체포된 이재유에게 갖은 고문을 다했다. 국제선과 연락해 전국조직을 결성하려 했다는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서 였다. 그러던 중 1934년 3월 어느 날 감시하던 간수가 졸고 있는 틈을 타 이재유는 탈옥을 시도했다. 1차 실패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재차 탈옥을 시도해 성공했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이끌고 탈출한 이재유는 경성제대 미야케교수의 집에 숨어들었다. 이재유는 미야케 교수의 집 아래 토굴을 파고 한 달 가량 숨어지냈다. 그러나 1934년 5월 17일 경성제대 조수 정태식과 미야케 교수가 검거되면서 더 이상 그곳에 머물수 없게 됐다. 미야케 교수가 하루 동안 시간을 벌어줘 이재유는 그 집을 탈출할 수 있었다.

  1934년 8월부터 이재유는 경성트로이카에서 활동했던 박진홍과 신당동 아지트에서 동거하면서 조직의 재건에 들어갔다. 그는 박진홍을 통해 동료들과의 연락관계를 재개하는 한편 이관술, 박영출 등과 운동방침을 다시 짜 나갔다. 10월 일제경찰은 이재유의 활동단서를 포착, 다수의 운동가를 검거,고문했으나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다. 일제는 체포된 사람들을 모두 석방하고 뒤를 추적하기로 작전을 바꿨다. 

  1935년 1월 4일 이인행이 검거됐고, 그 열흘 뒤 박진홍도 동료를 만나러 갔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이재유는 박진홍 검거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박영출을 신당동 아지트로 보냈으나 잠복중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박영출은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임신 중이던 박진홍은 이재유의 도피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버텼다. 그해 여름 박진홍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아이의 이름은 철창에 한이 맺혔다는 의미로 '철한'이라고 지었다. 아이는 2년만에 죽었다.

 

신출귀몰한 도피와 체포, 그리고 옥사

  이재유와 이관술은 농부로 변장해 중랑천 제방에 팜플릿 등 비밀서류를 모두 묻었다. 이들은 삼각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지금의 서울 도봉구 창동 )에 수재민으로 가장해 정착했다. 일제는 이재유를 잡기 위해 경찰력을 총동원했다. 경성 5개 경찰서 3천 여 명의 경관을 동원해 시내와 자하문 밖, 왕십리, 신설리, 신당리 일대를 이 잡듯 뒤지고 철도 주변을 살폈으나 이재유의 흔적은 오리무중이었다. 그 사이 이재유는 농민의 문맹을 깨우치는 농촌지도자로 변신해 주민들의 신망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 돼 있었다. 그는 경성준비그룹, 트로아카그룹 등에서 활동했던 옛 활동가를 모아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결성했다. 그는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당 재건운동을 위한 수단으로 정치신문을 활용했다. 정치신문 <적기> 1~3호는 1936년 10월부터 12월까지 발행, 배포하였다.

  이재유는 이관술과 함께 당재건운동을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적기>발행에 진력하고 있는 동안 일제경찰은 이재유를 잡기 위해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500원이라는 현상금을 걸어놓고 압박과 포위를 강화해왔다. 그러던 중 관련된 동지들이 검거되었고, 이재유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일제경찰은 상상할 수없는 끔찍한 고문끝에 최호극이 12월 25일 11시경 창동 부근의 산중에서 이재유와 만나기로 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재유는 12월 24일 <적기> 3호의 등사를 끝내고 다음날인 25일 최호극과 만나 그것을 전해주고 연락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약속 장소로 나갔다. 출발 전에 그는 이관술에게 만일 자신이 오후 2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검거된 줄 알고 도주하라고 일러두었다.

  이재유는 이렇게 하여 최후로 검거되었다. 농부, 장돌뱅이, 노동자, 학생 등 여러가지로 변장한 수십 명의 사복경찰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얻어 맞으면서도 최후까지 그는 동지인 이관술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온 동네에 다 들릴 정도로 고함을 쳐서 아지트에 있던 이관술이 자신의 체포사실을 알도록 한 것이었다. '체포되더라도 24시간은 절대 아지트를 자백하지 말라,' 이것은 엄혹한 지하활동을 하면서 이재유가 동지들에게 늘 강조하던 계율이었다. 이재유는 가혹한 고문과 악형에 맞서 이 계율을 몸소 실행했으며, 다음날인 26일 오후 6시 경에야 아지트를 자백하였다. 그러나 경찰이 출동했을 때 이관술은 유유히 사라지고 없었다. 

  1937년 5월 1일자 조선일보 호회는 "탈주 탈주 탈주 4년간 적색거두 이재유 피로, 신출귀몰! '칠종칠금' 피신술 일당 50명 금일 송국" 등의 큼지막한 제목과 함께 2면에 걸쳐 소설과도 같은 이재유의 흥미진진한 탈출기와 그룹 활동내용, 검거 경위 등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 다른 신문들도 앞 다투어 호외를 뿌렸다.

  이재유는 체포 후 약 4개월 간의 혹독한 고문 취조가 끝나고 1937년 4월 23일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그는 감옥에서도 동지들의 교양사업과 간수들에 대한 혁명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 아니라 조선어 사용금지  반대투쟁, 수인의 처우개선투쟁을 전개하는 등 굽힐 줄 모르고 투쟁하였다. 1942년 징역 6년의 형기가 만료됐으나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청주보호교도소에 다시 수감됐다. 이재유는 고문후유증과 심한 각기병으로 고생하다 해방을 10개월 앞둔 1944년 10월 26일 옥사했다. 그의 나이 40세 때다.       

 

이재유선생의 삶과 투쟁이 주는 교훈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가진 혁명가

이재유선생은 실제 양주군에서 농사를 지울 때 농민들이 생활실태를 조사하였으며, < 조선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특수성과 그 발전의 능부 >라는 글에서 당시 조사한 내용을 자세히 밝히고 있기도 하다. 이재유선생은 식민지 민중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진실로 가슴 아파했으며 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은 그의 삶 곳곳에 묻어있다.

 

  이론과 실천의 결합

이재유선생은 1930년대를 관통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직접적인 실천을 통해 민족해방과 계급투쟁을 이끌었으며, 투쟁속에서 조직을 건설하고 대중에 대한 신뢰와 철저한 준비, 이를 위한 일상적 학습과 실천 등이 어우러져야 해방운동이 전진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신념으로 활동하였다.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통일적해결

이재유선생은  시대가 일제강점기임을 하루도 잊지 않았다. 특히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계급투쟁을 중심에 두고 편향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경계하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가장 강렬히 비판하고 항거하며, 민족해방투쟁을 중심에 두고 실천하였다.

" 이재유는 혁명적이었던 만큼 민족적이었고, 민족적이었던 만큼 민중적이었다" _ 김경일

 

  민중과 함께( 대중을 중심으로 대중 속으로 대중과 함께 )

이재유선생은 무엇보다 일하는 노동대중의 주체성과 자발성을 키우고, 투쟁속에서 단련된 조직을 건설할 대 탄압을 견뎌내고, 해방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음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대중운동의 기반이 없는 중앙을 헛되이 만들어서는 안되며, 운동은 어디까지나 공장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대중의 운동이어야 한다는 것, 동지와 대중은 오로지 투쟁을 통해서만 획득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선생은 "노동자, 농민은 혁명적 대중으로서 본래적으로 결코 파벌적이지 않다"면서 "실천적 운동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구체적인 투쟁을 통하여 혁명적인 노동대중을 전국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활동해야 한다"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

선생이 옥사 한지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은 여전하다. 

  • 오늘날의 노동운동가들이나 사회운동가들이 노동자 대중과 인민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열성을 다해 활동하고 있는가?
  •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관계설정을 정확히 하고 이를 통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 노동현장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노동자들과 인민의 조직적 토대를 구축하고, 민중의 주체성과 자발성을 바탕으로 지도조직을 만들기 위해 힘을 쏟고 있는가?
  • 미래에 대한 전략적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전술적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하고 있는가?
  • 이론과 실천을 통일하고 그 차원을 높이기 위해 열성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노동운동가들과 사회운동가들은 이런 물음에 대한 응답을 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한국사회의 변혁을 위한 과정에서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들이기 때문이다. 이재유선생이 남기신 교훈은 이런 과제들을 풀어갈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

 

[ 이재유선생 연보 ]

1905년 8월 28일 함경남도 삼수군 별동면 선소리( 현 량강도 삼수군 변포리 )출생

1922년(18세)    상경

1924년(20세)   4월 사립보성고보 2학년 편입학, 6월 자퇴( 부친사망 )

1925년(21세)    4월 개성 송도고보 4학년 편입, 사회과학연구회 조직

1926년(22세)   11월 송도고보에서 퇴학처분, 12월 도일

1927년(23세)   사립 일본대학 전문부 입학, 동경대 신인회가 조직한 노동학교 등록

1928년(24세)   4월 조공 일본총국 위원, 5월 고려공청 일본총국 선전부 책임, 8월 제4차 조공사건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1930년(26세)  11월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개월 선고 받음

1932년(28세)  12월 22일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소

1933년(29세)   7월 조공재건 경성트로이카 결성

1934년(30세)   1월 이순금, 안병춘과 함께 서대문경찰서에 체포. 4월 서대문경찰서 탈출하여 미아케의 동숭동 대학관사에서 은신

1935년(31세)   1월 이인행, 박진홍, 박영출 체포, 신당동의 아지트에서 탈출,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에 정착

1936년(32세)   6월 조공재건 경성준비그룹 결성, 적기 1, 2, 3호  발행. 12월 25일 양주군 노해면 창동에서 체포

1938년(34세)   7월 징역 6년 선고

1944년(40세)   10월 26일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옥사